<역사의 그림자들>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에는 드러나지 않는 진실의 그림자들이 있다.


보편적으로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주목할만한 사건들을 역사학자들이 해석해 정리한 것이다. 특정 사건에 대해 역사학자마다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하지만 그 사건이 생긴 인과관계와 세부 진실을 명확히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젠킨스(K. Jenkins, 1943~)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역사가 아닐 수 있다...

역사는 역사(history)가 아니라 역사들(histories)이다”라고 역사의 복수성을 언급했다.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기반으로 하지만 진실과는 다른 해석과 평가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에는 드러나지 않는 세부 진실들이 있다. 이렇듯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에는 진실의 그림자들이 있다. 나의 작업은 내가, 당신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진실(truth)’일까? 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그 이면에 그림자처럼 존재하는 모호한 진실에 대한 물음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비이성적 행위로 인해 촉발된 다양한 사건들로 점철 되어왔다. 특정 집단이 전쟁, 테러, 폭력의 명분을 만들어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는 역사적 순환 고리에서 수많은 인간의 존엄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위협 받아왔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place)에는 그러한 증거들이 다양한 흔적과 표상으로 드러난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장소의 다양한 흔적과 표상의 기록을 응축 표현함으로써 역사의 그림자, 즉 역사의 진실에 대한‘모호성(ambiguity)’을 제기하고자 했고 작품속에 현재적 이미지를 대비시켜 역사의 모호성을 더 극대화하고자 했다.

 

 

 

역사의 그림자들(Shadows of History)


앙가쥬망

하춘근의 사진 작업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의미들과 그 맥락의 측면에서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회 참여(engagement)’란 말은 통상적으로, 사회를 관통하는 동시대의 움직임에 뛰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춘근의 사진 작업이 갖는 첫 번째사회참여의 의미는 사진작가로서의 본분을 살려 작가 자신이 창조한이미지를 수단으로 각종 예민하고 어려운 현실의 상황들에 예술가로서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사회참여의 의미는, 하춘근 작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이 현대 사진예술의 위상에 대해 나름의 깊은 통찰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사실 하춘근 작가는 어떤 의미로는 누구나 찍을 수 있다고 생각될 법한 사진을 찍는다. 때때로 그의 사진은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거나, 쉽게 가볼 수 있을 것 같은 장소와 풍경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들의 중첩이나 몽타주 기법을 통하여 그의 이미지들은 뚜렷한 동시에 흐릿한, 감성적인 동시에 의미를 담은, 불분명한 동시에 단호한 뉘앙스를 획득하곤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두 가지 측면의 사회참여가 완성되는 방식이, 여러 이미지들의 중첩을 통해 작가의 사진작품 최종 이미지가 완성되고 풍부해지는 것과 같 은 방식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이러한 두 가지 타입의 사회참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사진 이미지들은 자신만의 고유한 힘을 갖게 되며, 평범함으로부터 벗어나 성공적인 사회참여의 특징인 의미작용의 길로 나아간다.

 

작업의 준비과정과 시리즈 작업

하춘근 작가의 작업방식은 무척 세심하다. 그는 충실한 사전 작업을 실행한다. 한국의 지도부터 시작하여 당연히 대상 지역에 대한 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는 사전 작업을 해나가면서 작은 작업노트에 최종 이미지를 스케치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는 마치 캔버스 위의 본 작업에 착수하기 전에 수없이 종이에 크로키를 하는 화가처럼 작업을 진행한다. 작가의 작업노트에 있는 데생을 보면, 그에게는 작업의 테마에 접근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그 테마는 주제, 회화적 용어로 달리 표현하자면 모티프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우선 유사성에 의한 접근이 있으며, 이동하거나 같은 장소를 근접하여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점에 의한 접근, 그리고 모티프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한 접근이 있다. 작업은 서로 중첩되고 적절히 끼워 맞추어지는 서로 다른 여덟 개의 이미지를 기본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경우, 예를 들면 다리나 문의 경우에는 비슷한 거리에서 촬영된 뒤 서로 중첩된다. 두 번째의 경우, 이동으로 인한 서로 다른 장면을 담는다. 그리고 각각 촬영된 여덟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는 같은 시퀀스의 순간들이다. 세 번째 경우에는, 여러 모티프들이 최종의 이미지에 근접하는 것에 의해 이미지가 구축된다. 그의 사진 작업은 시리즈의 방식에 따라 진행되어 왔다. 하춘근 작가를 사로잡은 작업의 주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선 독도, DMZ, 히로시마와 같은 주제가 있다. 그리고 또 마을을 둘러싼 산 에서 내려다 본 어떤 마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라든지, 버스나 차를 타고 달리는 여정, 혹은 이름 모를 동네의 폐건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각각의 주제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강렬한 의미를 가진 것도 있고, 혹은 언뜻 보아 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듯 여겨질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런 이유로 일상에 관련되어 있는 소재 는 덜 정치적인 또 다른 타입의 주제로 이어진다. 이런 타입의 시리즈들은 우리의 지각기관에 관련된 주제를 제시한다. 이런 주제는우리의 지각작용을 다루는 동시에 지각의 망설임, 모호성, 불명확 함,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해 다룬다. '습관’이란 우리가 납득하고 이해한다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믿도록 종용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지각작용은 더욱 복잡 미묘하고 다양한 과정을 통해 섬세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결국 우리가 이미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불확실한 무언가이다.

지각(知覺)의 다양한 양상

하춘근 작가의 작업은 확실히 우리의 몸에서, 또 뇌에서 이루어지는 지각의 작용을 의식하도록 만든다. 이 지각의 과정은 다양한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단계는 물론 눈으로 바라보는 찰나의 순간이다. 그 순간 모든 것은 확실한 듯이 인식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들, 희미한 추억들, 직접적으로 감지되지 않는 요소들, 예를 들어 시각 영역의 한계, 거기에서 우리가 본다고 확신하는 것이 충돌한다. 그러나 시간은 준엄하게 흘러가고 우리는 이런 디테일들에 멈추어 있을 수 없다. 두 번째 단계는 찰나보다 우위에 있는, 말하자면 일정단위의 지속된 시간이다. 다소 길거나 짧은 이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은, 우리가 평소에 보고 기억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 시간 동안 찍힌 사진 이미지들은 우리가 잊어버린 디테일들, 모호하고 덧없이 흘 러간 것, 당시에는 몰랐던 순간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짧은 몇 시간 동안의 여행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려고 할 때, 어떤 특정 장소나 지역을 방문하거나 할 때의 경우이다. 세 번째 단계는 가장 일반적인 경우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가 애써 기억의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거기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확한 것인지, 혹은 무엇이 허구인지 를 구분해내기가 어렵다. 우리는 기억에 의해 회상하게 되는 어떤 것들에 대해 그저 느긋하게좋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할 수 있다면, 단지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문득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온전하지 않은 기억 속의 수많은 요소들은 우리가 정확한 것이며 사실이라고 믿는 이미지를 강하게 뒤섞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이미지의 중첩으로 구축된 하춘근 작가의 사진이미지들은 어떤 장소, 주제, 혹은 삶의 순간에 기반하 여 형성된 독창적인 이미지의 시리즈이다. 각각의 사진은 모두 지각경험의 진실성과 무의식적인 지각 메커니즘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사색을 담고 있다.

 

 

앵글과 움직임


작가는 사진에서의 이미지 배치에 매우 신중하다. 준비단계의 에스키스나 데생이 보여주듯이 최종 이미지는 섬세한 준비와 현명한 계산의 결과물이다. 이미지의 중심부가 가장 중요한데, 왜냐하면 거기에서부터 최종 이미지에 이르는 균형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레일, 다리의 들보, 산의 정상부 혹은 절 등 중심부는 각각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중심축이다. 종종 바위들 혹은 문들 사이의 빈 공간이라는 요소가 구도를 강화하거나 전체 이미지의 강한 토대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것은 중첩으로 인해 다소 혼란스럽고 불확실하며 흐릿하게 보이는 최종 사진이미지에 어떤 형태의 우아한 생동감을 부여하는 균형감을 위해 서 전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그의 사진 이미지들은 또한 교육적 기능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사 진들이 다루는 주제 때문은 아니다. 그의 사진 이미지들은 우리의 눈이 떨림 속에서 무언가를 찾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하춘근 작가의 사진이미지를 주의깊게 바라보다 보면 문득 깨닫는다. 인식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흘러가는 시간의 선()적인 움직임뿐만 아니라 눈, 눈썹 같은 몸의 떨림이 속하는 공간적인 움직임, 그리고 기억의 움직임도 포 함하는, 표면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의미한다. 하춘근 작가의 사진은 찰나의 순간이 아닌 빛과 공간의 진동으로 변환되는 연속선상에서의 시간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현상은 인식의 지평에서 작용한다. 사진의 이미지들은 시 각과 정신의 한계 같은 풍경에서 정신세계의 지평을 보여준다. 작가는 우리가 그것을 이미 정해진 안정적인 구조 속에서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새로이 형성된 공간처럼 지각과 시각의 여러 층위의 중첩을 통해 발견하도록 만든다.




사진의 표면을 흔드는 노이즈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일반적으로 사진은 인증의 자료이자 객관적 실체를 모방하는 강력한 매체로서 그 사실성, 재현성이란 측면에서 의미를 부여받았다. 회화나 조각과 달리 사진은 기계에 의존해서 표현해야 하는 차이가 있다. 주어진 기계의 메커니즘(작동원리)을 따르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서 다양한 변주를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모색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진의 역사란 결국 사진이란 매체를 질문하는 개념적인 성격이 짙으며 기존 문법 체계를 부단히 흔든 결과일 수 있다. 그것은 사진의 재현성을 질문하고 동시에 사진의 기계적 속성, 정해진 문법 바깥을 부단히 확장시켜온 궤적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들 네 명의 사진작가들 또한 전통적이고 정형화된 사진의 언어와 기법에 다소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노이즈’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이른바 사진의 어법, 문법을 나름대로 재배열하거나 슬쩍 비틀어 모종의 틈을 벌린다는 생각이다. 그 틈이 결국 이들이 생각하는 사진에 대한 인식, 논리거나 또는 사진 매체를 개성적인 도구로 활용하는 궤적을 보여주는 풍경일 것이다. 분명 특정 대상을 촬영한 것으로 보이지만(각자 그 편차는 다르지만) 사진에 담긴 대상이 좀처럼 시선에 잡히지 않거나 흐려지거나 흔들리고 있어서 가시적 시계視界에서 미끄러지거나 애매한 편이다.


하춘근은  ‘역사와 휴머니즘’에 관한 자신들의 인식을 표명하는 선과 맞물려 있다. 이들에게 사진은 개념을 전달하는 동시에 사진이란 매체를 질문하는 수단이다. 그의 작업은 사진이란 매체의 확장된 시도 안에서 여전히 사진이기에 가능한 세계를 탐색한다는 공유성이 있다. 동시에 현상 너머의 것, 보이는 세계 내부에 자리한 모종의 심연과도 같은 것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지도 모르겠다. 사물의 현상적 측면이 아니라 그 이면을 응시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그것은 모든 시각이미지가 궁극적으로 가닿고자 하는 곳 아닌가?

 하춘근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던 특정한 장소를 찾아 그곳의 장면을 무수히 중첩, 응축시킨 사진을 선보인다. 과잉된 이미지의 겹침, 시간의 누적으로 인해서 인지 가능한 대상이 사라져버리고 모종의 흔적, 선과 색채, 흐름만이 인지되는 그런 사진이 되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여러 사건의 진실에 대한 의문, 모호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려는 시도에 의한다. 작가가 찾아가 그곳을 감싸 안고 있었던 시간을 기록한 장소는 바로 20세기 들어와  전쟁과 폭력, 테러, 죽음 등이 머물고 간 곳들이다. 그곳은 지난 시간을 환기시키는 동시에 이미 그 사건이 사라져버린 부재의 공간이기도 하다. 1945년 8월 6일과 8월 9일에 원폭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1948년 4월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6년이 넘는 기간 동안에 제주 인구의 약 10분의 1이 죽는 대참살극이 벌어진 이른바 4.3사건의 장소인 중산간 일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 전문 제 1조에 의해 설정된 동서길이 248km(155마일)의 DMZ(비무장· 비전투지역), 그리고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난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TC)쌍둥이 빌딩 자리가 바로 작가가 수차례 방문하고 촬영한 장소들이다. 지금 그곳은 기억과 애도의 장소가 되어 보존된다. 폐허가 되어버린 곳이자 애도와 기념의 공간으로 탈바꿈 된 곳이라 본래의 상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작가가 찍고자 했던 것은 특정 장소라는 대상, 이미지가 아니라 그곳에 있었었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그 무엇이자 동시에 비극적 사건의 실체와 그러한 폭력과 죽음을 몰고 온 진정한 이유, 인간의 죽음과 이데올로기 등을 질문하고자 하는 의도인 셈이디.